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아비스 왕조의 몰락 ==== '''[[엔히크 1세]]'''는 성직자 직을 사임하고 대관식을 거행한 뒤 아비스 왕조를 지속하기 위해 신부를 맞이하기로 하고 [[교황청]]에 성직 서약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같은 가문 출신이자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길 원했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엔히크는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사로잡힌 15,000명의 병사들과 장군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몸값을 협상했으며, 세바스티앙 1세가 실종된 후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후계자를 지명하라는 요구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해달라는 [[안토니우(포르투갈)|안토니우]]의 요구를 [[사생아]]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1579년 11월 23일 안토니우의 포르투갈 국적을 박탈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타국으로 추방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안토니우는 당국의 추적을 피해 숨어지내면서 추종자들을 모집했다. 1580년 1월 30일, 엔히크 1세는 알메이링 궁전에서 6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리스본 대주교 주제 드 알마르다, 주앙 테요, 프란시스쿠 드 사 드 메네세스, 디에구 로페스 드 소자, 주앙 드 마스케르나스 등 5명의 대신들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를 세우게 했다. 안토니우는 엔히크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놓고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제4대 기마랑이스 공작 두아르트의 딸이자 마누엘 1세의 손녀이며, 포르투갈의 강력한 귀족인 브라간사 공작 주앙 1세의 아내인 카탈리나도 포르투갈 왕위에 도전했다. 하지만 섭정위원회는 두 사람 모두 왕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안토니우는 사생아이니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고, 포르투갈에서 여왕이 인정된 사례가 없으니[* 1116년 [[테레사 데 레온]]이 포르투갈 여왕을 자칭한 적이 있었지만 어떤 국가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1383년 [[베아트리스(포르투갈)|베아트리스]]가 남편인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카스티야)|후안 1세]]에 의해 포르투갈 여왕으로 내세워지기도 했지만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 카탈리나 역시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자신의 전 아내 마리아 마누엘라가 [[주앙 3세]]의 딸이며 자신 역시 포르투갈 왕실과 혈연 관계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막대한 뇌물을 보내자, 섭정위원회는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옹립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안토니우는 이에 맞서 백성들에게 [[주앙 1세]]가 1383년 ~ 1385년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으로부터 포르투갈을 구한 일을 상기하라고 호소했다. 주앙 1세 역시 사생아로 간주되었지만 카스티야의 압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났고 그의 후예들이 200여 년간 나라를 이끌었으니, 자신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왕국이 자국을 병합하기를 원하지 않은 민중은 이에 호응했고, 그는 1580년 7월 24일 산타렘에서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했다. 여기에 리스본과 세투발 등지에서도 그의 추종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한 달 후인 1580년 8월 25일, 안토니우는 펠리페 2세가 급파한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를 상대로 알칸타라 전투를 치렀다. 알바 공작이 이끌고 온 병력은 보병 18,000명, 기병 2,000명에 달한데 비해, 안토니우가 이끄는 병력은 보병 8,000명에 기병 1,800명에 불과했고 훈련도 역시 지극히 열세했다. 그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알칸타라 강의 왼쪽 둑에 자리를 잡고 그 옆의 요새에 의지한 채 수비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강을 도하하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맞서는 사이, 스페인군 좌익 부대가 비밀리에 다른 곳에서 강을 도하한 뒤 요새를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추종자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안토니우는 비아나 데 카스텔로로 피신했다. 얼마 후 산초 데 아빌라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비아나 데 카스텔로에 이르자, 그는 다시 그곳을 탈출한 뒤 왕국 각지를 방랑하다가 1581년 6월 [[잉글랜드 왕국]]에 망명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알현해 군사적 지원을 구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1582년 [[아조레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에 들어간 뒤 그곳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면서 펠리페 2세의 해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아그라 요새 방어를 강화하고 동전을 주조했으며, 프랑스 왕비이자 실권자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1583년 [[레판토 해전]]의 승리를 이끈 알바로 데 바잔 제독이 이끄는 스페인군과의 항쟁에서 패배를 면치 못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스페인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간의 전쟁이 벌어지자, 1589년 다시 잉글랜드로 이동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번에는 그를 돕기로 하고, 브라질과 아조레스를 잉글랜드에 넘기는 대가로 안토니우를 복위시킨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1589년 6월 3일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와 함께 리스본으로 항해해 리스본 성벽 밖의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잉글랜드 함대는 역병에 시달리다가 본국으로 돌아갔고, 안토니우는 배에서 내린 뒤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리스본을 공략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자 스페인군의 추격을 피해 프랑스로 다시 피신했다. 그는 이후에도 포르투갈 왕위를 쟁취하려 시도했으나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1595년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아비스 왕조는 막을 내렸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국과의 동군연합인 [[이베리아 연합]]에 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